# 1. 책임감에 대하여.

 

나는 소위 말하는 올빼미 인간이다. 똑같은 7시간을 자더라도 새벽 1시에 자서 8시에 일어날 때는 문제가 없지만, 10시에 잠자리에 들어서 새벽 5시에 일어나야 한다면 첫째로 알람 시계가 없이는 매우 힘이 들고, 일어났다 하더라도 하루는 내내 평소보다 월등히 떨어진 것만 같은 에너지 레벨을 느낄 수가 있다. 그런 내가, 아침에 시까지는 일어나야만 하는 생활을 하게 되면서부터는 나도 모르게 가끔 아침에 불쑥 불쑥 화가 치밀어 오르는 모습을 수가 있었다.

우스운 것은, 어릴 적엔 그나마 알람이 울리기 전까지는 세상 모르고 잠에 빠져 있다가 천둥처럼 울리는 알람 소리에 화들짝 놀라서 깼던 기억이 있는데, 지금은 시계가 울리기 전부터 미리 가슴 졸이며 뒤척뒤척 잠을 깨기도 한다는 . 이불 속에서 뭉그적거리며 '대체 나는 잠도 마음껏 수가 없는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 일찍 일어나야 되는가?'라며 나를 일어나게끔 만드는 누군가, 또는 어떤 일을 탓하며 짜증내고 화를 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누군가는 이렇게 얘기하겠지. "일어나기 싫으면 일어나면 되잖아? 그냥 ~!"라고. 나라고 그러고 싶을까? 하지만 싫든 좋든, 나는 하여튼 일어나서 침대 밖으로 나와야 한다. 이유는 내겐 학교를 가야 하기 때문이든, 일을 하러 가야 하기 때문이든, 또는 부모님 아침상을 차려드려야 하기 때문이든, 어쨌거나 '해야만 하는 ' 있기 때문이다. 내가 일을 내팽개쳐버리고 무시할 만한 배짱이 있다면 지각을 하든, 누가 나더러 잔소리를 하든 실컷 늦잠을 자버리겠지. 하지만 나는 무책임한 인간이 아니니까 기분이 어떻든, 어쨌거나 일어나서 맡은 책임을 다하기 위해 일어나서 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게 배짱이 없어서이든, 책임감이 강해서이든, 최소한 자기에게 지워진 일들을 착실하게 해오는 사람들에 의해서 그래도 세상은 돌아가고 있는 것이고.

어쨌든, 다시 일어날 때의 기분 이야기로 돌아가서... 보통은 군소리 없이 일어나서 일을 하러 가다가도 어떤 날은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오르며 나를 일찍 일어나게끔 만드는 학교를, 일터를, 가족을 탓하는 것일까?

이유는 간단했다. 화가 치밀어 오르는 그런 , 내게는 내가 일어나서 해야만 하는 일의 의미가 하나도 없었다.

학교에서 배우는 거라곤 실생활에서는 아무 쓰잘 없는 것들 뿐인데 대체 하루 온종일을 학교에 붙잡혀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고, 맘에도 드는 상사 비위를 비굴하게 맞춰가며 돈을 벌어봤자 먹고 살기에도 빠듯한 생활이 언제 피게 될는지도 모르겠으며, 우리의 부모님들은 내가 무엇을 해도 성에 차지 않고 남의 잘나가는 아들딸들처럼 되기만을 원하시는데 도대체 어떻게  해야 그들처럼 자랑스런 자식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사랑하는 가족들을 실망시키고 싶진 않으니, 무책임한 인간으로 사회에서 떨려 나가는 것은 싫으니, 내가 있는 것은 그래도 몫으로 지워진 일들, 비록 지금 내게 있어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의무일 뿐이지만... 최소한 맡은 책임이라도 하는 것인데... 언제까지 도리는 하는 책임감 있는 인간으로 그들 안에서 인정은 받는 대신, 스스로는 화나고 불행한, 인생에 도통 재미라곤 없는 인간으로 남아있어야 할까.

 

여기서 내가 깊이 생각해보았어야 하는 점이 있었다. 내게 있어 책임감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 대체 어떤 의미였는지.

언제부터 "책임감 있는 사람" "시키는 일은 군소리 없이 잘하는 인간," "사회의 법칙에 자신을 맞추는 인간" 동의어가 되었는가?

 나는 "책임감 (responsibility)" "의무감(obligation)" 혼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거기서 불행하고 화나는 아침과, 행복한 고양이처럼 기지개를 펴다가 벌떡 일어날 있는 아침의 차이가 생겼던 것이다.

  일을 해야 하는지, 스스로 부여한 의미가 없이 그저  어떠한 identity 부여 받은 사람으로서 - 학생으로서, 직장인으로서, 자식으로서... - 부여된 identity 따르는 "당연한" 의무를 계속 행해야 한다면, 의무는 어떠한 즐거움도, 사명감도, 가슴 떨림도 없는, 그저 고통스러운 일이 되어버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의무감의 고통에 시달리는 이들은 돌파구를 찾으려 하고, 그것은 보통 다음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는 하다;

무감각해지거나, 내게 identity 의무를 부여한 주체라고 믿는 개체 또는 집단과 스스로를 동일시하여 보다 적극적으로 자신만의 자유 의지를 잊어버리거나, 분노의 화살을 주체를 향해 돌리게 되는  .

앞의 가지 경우는 소위 말하는 "대세" 합하는 모습이기 때문에 그다지 반향이나 자각을 주지 못한다. 하지만 분노가 밖으로 드러나는 경우에는 얘기가 달라진다. 상황이 맘에 들지 않는다, 나는 다른 것을 원한다는 메시지가 의식의 표면으로 떠오르는 것이니까. 하지만 거기서 생각이 조금 나아갔더라면 오죽 좋았을까 마는, 화를 내고 있을 때의 나는 사람이 모든 불행의 근원이고, 내겐 상황을 바꿀 어떠한 힘도 없으니 그저  납작 엎드릴 밖에 없는 나를 미워하거나, 사람을 미워하는 밖에는 어떠한 도리도 없다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니체는 사람의 정신이 낙타, 사자, 어린 아이의 모습처럼 변해간다고 했다. 사람이 처음 태어났을 그의 정신은 마치 낙타처럼 주인이 지운 무거운 짐을 등에 가득 지고 있다. 짐들은 기존 사회가 부여한 모든 가치와 의무감들이다. 짐을 지고 가던 낙타는 어느덧 외롭고 황량한 사막으로 들어서게 되고, 바로 그곳에서 낙타는 사자로 변모하게 된다. 그리고 사자는 온몸의 비늘 하나 하나에 'Thou shalt' - '너는 이렇게 해야만 한다' - 새겨진 용을 무찔러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 깊게 들어야 점은, 낙타가 가진 짐이 무거우면 무거울 수록 사자의 힘은 더욱 강해진다는 것이다. 그렇게 이전에 맹목적으로 따르던 가치관과 의무감을 넘어선 사자는 이제 순수한 어린 아이로 바뀌어, 어떤 누구의 rule 따라서가 아닌, 바로 자신이 주체적으로 창조해나가는 세상을 살아가게 된다.

 

 

의무감과 책임감이 같다고 생각하던 때의 나는, 내가 낙타의 짐을 짊어지고 끝없이 고통 뿐인 사막만을 걸어가야 하는 불쌍하고 무의미한 존재라 생각하며 살았다고 있겠다. 무거운 짐을 지운 주인을 원망하며, 그가 죽거나 내가 죽어야만 지루한 게임이 끝날 거라 생각하는, 아무런 희망도 없는 낙타.

하지만 끝이 없어 보이는 사막도 끝은 있으며, 바로 사막과 무거운 짐이 있었기에 묵묵히 짐을 지고 낙타는 곳에서 마침내 나타나는 용을 맞서 싸울 힘을 가진 사자로 변모할 있었다. 세상이 시키는 대로 살아가기만 하던 사람이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에 집중하게 , 낙타가 짊어진 짐은 의무감이라는 이름의 거추장스러운 짐이 아닌, 내가 의미를 부여한, 스스로 지고 가는 책임감이라는  이름의 소중한 자기 수련의 도구가 된다.

 

이제  다시 불쑥 화가 치밀어 오르는 때가  온다면, 이전처럼 남을 탓하고 미워하거나 어질지 못한 스스로를 책하는 대신에 낙타와 사자를 떠올려 보려고 한다. 그저 시키는 대로, 그래야만 하니까 감정에 감고 막으며 내가 죽을 때까지 짐을 지고 가는 것도 아니고, 내게 지운 주인을 없애버리는 것도 아니다. 내가 지고 가는 짐이 사자가 되었을 때의 나에게 어떤 힘을 길러주고 있는 것일까? 용을 무찌른 다음의 나는 어떤 세상을 만들면서 살고 싶은가?

 

부디 이렇게 생각하며 오늘 순간 순간을 살아가는 나이기를.

 

Posted by Jivanmukta :